ㅇㅇㄴ님) 1차NL/19/11000

2016. 6. 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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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어가 비처럼 쏟아졌다. 외이를 타고 흐른 음성이 고막을 두드렸다. 모든 소음은 타다 만 뇌에 도달하기 전에 의미를 잃고 사그라든다. 그렇다 해도 대화의 주체가 멀뚱히 자신들을 쳐다보는데도 일체의 머뭇거림 없다는 건 꽤 의아한 일이다.

  에셋은 주변을 오가는 흰 가운을 바라봤다. 의식하고 행하기보다 어른거리는 잔상에서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초점 잃은 동공에 빛이 연신 쏟아졌다. 눈이 부실 법 하건만 그는 미간도 찌푸리지 않는다. 오직 근육만이 제 기능을 해 홍채가 수축이완을 반복했다.

  “이상 없습니다.”

  눈꺼풀을 억지로 들추던 남자가 멀어졌다. 이내 왼팔에 서넛이 다닥다닥 붙어 섰지만, 잠깐의 해방감은 숨을 내뱉게 했다. 직선으로 쏘아지는 조명 하나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풀렸다.

  흰색 가운과 대비되는 검정 나사들이 종종걸음으로 문 뒤를 정리하고 있었다. 에셋은 익숙한, 싫은 느낌에 입술을 삐죽였다. 흘긋 동선을 파악하면 아마 자신이 저기서 나왔을 테다. 왜?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그만 몸짓에도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원을 그리던 총구가 바짝 긴장한다. 그들은 놀고 있는 게 아니었어? 그럼 나도 모닥불이 아니야.

  “에셋. 에셋?”

  능글맞은 미소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털이 숭숭 난 짧동한 손가락이 딱딱 소리를 냈다.  에셋은 제 왼손을 까닥였다. 사람들이 잡고 있지 않더라도 저런 소리는 낼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기억나나?”

  돼지 손이 말했다. 에셋은 침을 꼴딱 삼켰다. 전혀 본 적이 없다. 입술만 달싹이자니 남자가 손뼉을 짝짝 친다.

  “됐어. 다른 정비는 필요 없다.”

  그는 콧노래 흥얼거리며 코 높은 구두를 바닥에 굴렸다. 에셋의 머리 위 괴랄한 기구를 쓰다듬으며 자랑스런 표정을 했다. 최상의 발명품이라며.

  검정색 검정색 갈색. 에셋은 분주해진 머리통을 살폈다. 온통 검정색 갈색. 먹은 게 없어도 게워내고 싶어지는 심정이다. 그는 시선을 내렸다. 팔에 매달린 농구공 사이로 조막만 한 햄스터가 한 마리 붙어 꼼질댔다. 그건 저편에 심어진 그림자와 같아서―

  ‘누구’

  에셋은 아주 혼곤해졌다. 요리조리 기울어지는 고개는 재가 되어버린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절로 등이 굽어지고 속이 울렁댔다. 명치를 누가 헤집는 느낌이 났다. 머리가 쪼개지고, 천둥이 치고, 흰 가운에 크랙클, 

  입안이 바싹 말라 혀가 길게 빼어졌다. 밭은 숨소리 열기를 내뿜고 바이탈 체크가 급격히 상승했다. 삐삐거리는 소음이 자꾸 뭔가를 부추긴다.

  [반가워, 나는―]

  어린아이의 음성. 고개를 푹 숙였다.

  “스티…….”

  “응? 뭐라는 거야.”

  기계쟁이 옆에 붙어있던 총구가 관자놀이에 와 박혔다. 공간의 모두는 그에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슬슬 풀어지던 습기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칼날을 걷는 꽃잎이 두 동강 났다. 에셋의 안광이 번뜩인다. 



1.

  딱딱한 나무 의자에 엉덩이가 배겼다. 버키는 연신 꼼질대며 몸을 흔들어댔다. 엄마가 눈치를 줬지만 아직 어렸던 탓에 예배시간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느지막하게 이어지는 말소리는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했다. 아마 신부님도 졸다 깨는 것이리라. 갑자기 신부님이 박수를 쳤고, 엄마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가 화들짝 들린다. 버키는 혼자 소리 죽여 킥킥댔다.

  “얘, 조용히 해.”

  동생과 손장난 치며 웃음 참던 그에게 내뱉어진 말이다. 앞줄에 앉은 자그마한 아이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쥐기만 해도 툭 부러질 것 같은 손목에 가늘게 흔들리는 검지를 유난히 생기 있는 입술에 가져다대고 말했다. 돌려진 목이 안쓰러워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곧 아이는 자세를 바로 했고 버키는 자신의 행동을 약간 후회했다. 조금만 더 대화해보고 대답할걸. 반듯한 뒤통수도 무척 예뻤지만 뇌리에 아로새겨진 길다란 속눈썹과 색채 밝은 눈동자가 떠나질 않았다. 오밀조밀한 콧등, 발그레한 입술.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원래 그런 것일지 뺨에는 약하게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예배에 무척 골몰했기 때문일까 아이는 속닥거리며 아멘, 아멘 신실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단 한 번 들었던 목소리는 귓가에 아직도 휘몰아 많은 목소리 속에서도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버키는 처음으로 손깍지를 꼈다.

  ‘하나님 저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게 해 주세요.’

  스테인드글라스 통과한 햇살이 색색으로 사람들 머리를 물들였다. 태양은 노란빛을 쏘아댔고 유리를 통해 뻗쳐진 건 무지개다. 예수님이 양 한 마리 안고 허리를 굽어 살폈다. 버키는 처음으로 햇살을 맞았다. 그의 흰 솜털이 따스한 색으로 뒤덮였다. 기억하는 첫 장이었다. 



2.

  멍청하던 표정에 생기가 돌았다. 각자의 일에 빠졌던 주위가 삽시간에 찬물을 뒤집어썼다. 황홀경 헤적이던 박사가 흥 깨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에셋은 오른쪽 관자놀이를 꾹 쥐어박는 검정 총신을 노려봤다. 숨소리만 가득했다.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왼팔을 정비하던 연구원들이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침 넘어가는 소리 들릴까봐 목넘김을 주저한다. 바싹 마른 속이 탔다.

  침묵을 깬 건 박사였다. 아닌 척 가운에 대강 처박았던 권총을 꺼냈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걸음을 떼었다. 자그만 검정이 흔들린다. 살얼음에 금이 쩍 갔다.

  “자, 긴장 풀고…….”

  발밑이 와르르 무너졌다. 비유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다란 장총이 우직, 나뭇가지처럼 동강났다. 점검이 끝나지 않은 왼팔의 열린 접합부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보라색 푸르게 번뜩이는 게 곧 폭발할 지도 모른다. 공간에 박힌 작은 우주가 원자로처럼 크게 일렁였다. 에셋이 오른손으로 왼쪽 팔뚝을 쥐었다. 기계를 상회하는 악력이 스스로의 빈 공간을 억지로 끼워 맞춘다. 그는 뼈, 혹은 강철 갈리는 소리를 내더니 곧 자신의 허벅지를 조준한 박사의 목을 틀어 올렸다. 모든 건 찰나에 일어난 일이다. 그가 내딛은 걸음이 타일을 깨부수고 콘크리트를 움푹 패었다. 

  “으, 큭, 에, 에세, 크억.”

  박사는 채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딸려 올라갔다. 떨어진 권총은 에셋의 발에 채여 산산이 부서졌다. 반짝이는 파편은 유리 세공품을 보는 것 같았다. 침을 질질 흘리는 박사가 강철 팔에 손톱을 세워 긁어내렸다. 그래봐야 인간의 살점만 떨어져 나갈 텐데. 덜렁이는 손톱뿌리가 은색에 매달려 선연했다. 에셋은 눈 밑을 잘게 경련하더니 손아귀를 더욱 옥죄었다. 희번뜩 흰자가 드러나자, 요원 중 한 명이 손가락을 까딱이고 말았다. 총성은 목뼈 꺾이는 소리에 묻혀 싸늘하게 굳어갔다. 맞히지 못한 총알이 건너편 전등을 깼다. 떨어지는 조각은 눈꽃이었다. 겨울의 등 뒤로 눈발이 날린다.

  “괴, 괴물…….”

  겁을 집어먹은 한 놈이 정신 못 차리고 연발했다. 지하실 낮은 천장에 탕, 탕 귀를 울리는 소음은 심장박동과 리듬을 같이했다.

  “이 새끼 죽고 싶나!”

  개중에 우두머리가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에셋은 숨이 끊진 덩어리를 방패삼아 앞을 지켰다. 와 박히는 총알이 시체에 구멍을 뚫었다. 펌프가 멈췄어도 혈액은 아직 뜨시게 핏줄을 돌아서, 이미 죽어버린 입가로 왈칵 뱉어졌다. 쇠 비린내 폐에 훅 끼쳤다. 향에 취한 대다수가 패닉을 헤맨다. 차분한 미치광이는 여유롭게 그들을 압도했다.

  “정신 차려라. 겁먹은 놈은 내가 먼저 죽인다. 사격.”

  그래도 떨어진 명령은 벌벌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나사 하나하나가 일제히 탄창을 당겼다 놓았다. 철컥대는 소리는 그를 더욱 자극한다.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빈 탄창이 우수수 떨어지는 동시에 은색 팔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깨달음 얻을 때에는 이미 무너지는 자신의 목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으, 으아아”

  벌어진 입에서 알 수 없는 탄성이 새 나온다. 철의 비가 쏟아져도 걸음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허벅지에 한 방, 복부에 두 방. 헐벗은 피부에 붉은색이 터졌다. 그래도 손속에 어긋남이 없어서, 가장 가까이 선 대장을 솜털처럼 날려버렸다. 거꾸로 처박힌 건 내장이 터져서 움직이지 않는다. 

  명령을 잃은 나사 무더기가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음습한 지하실은 내뱉는 이산화탄소로 가득 찼다. 에셋은 유일하게 땅을 딛고 선 존재였다. 봉해졌던 겨울은 녹으면서 뼛속까지 한기를 내뿜었다. 그건 역시 인간이 아닌 것의 모습이라, 들고 선 총은 처음부터 무용지물이었다. 그제야 알아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그러모아도 산소는 부족해서 폐는 천천히 짜부라진다. 그때였다. 흰 가운에 싸인 말라빠진 몸뚱이가 에셋을 마주봤다. 어디서 불쑥 솟구친 남자는 한심한 몰골이었다. 무리에 파묻힌 럼로우는 희뿌연 망막 너머로 생각했다. 저 새끼가 자살이 하고 싶거든 지 방에서 죽지. 굳은 손목으로 조준경을 맞췄다. 그래도 잘 되었다. 에셋은 조그만 남자에게 정신이 팔렸다. 남자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면 방아쇠를 당기자. 머리가 몸과 분리되면,

  분리되면,

  분리되면. 이명이 째깍째깍 고막을 때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에셋은 움직이지 않는다. 말라깽이가 온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지, 진정…….”

  목이 메여 단어가 끊겼다. 흉포함이 넘치는 눈동자가 오롯이 박혔다.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동공이 확 수축했다. 작은 남자는 숨이 멎는 압박에서도 양 팔을 펼쳐보였다. 시선이 무엇도 쥐지 않은 손을 훑었다. 하얗게 골아서 뼈대가 불거진 손가락이 바람맞는 나무처럼 무섭게 바들댔다. 치수가 맞지 않는 가운이 흘러내려 드러난 손목은 지나치게 투명해서, 안쪽의 핏줄이 확연히 도드라진다. 몸에 오한이 드는 것과 같이 푸석한 밀 색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그러나 단 하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에셋은 시리게 푸른 눈동자에 오감을 집중했다. 고소한 버터향이 코끝을 스치는 착각이 든다. 오래전 벗어둔 낡은 셔츠와 같이 빛바랜 느낌이었다. 아스팔트에 말라붙은 뇌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남자는 움찔거리면서도 멀어지거나 시선을 피하는 기색이 없다. 두려움에 밀려 눈을 떼면 순식간에 목줄기를 물어뜯길 것이다. 모래를 그득 머금은 것처럼, 바싹 마른 목구멍이 까끌거렸다. 남자의 발바닥으로 시커먼 공포가 스몄다. 소용돌이치는 두 쌍의 눈동자 사이에 전류가 흘렀다. 에셋은 환청을 들었다.

  [반가워, 나는ㅡ]

  “스티브,”

  오래간 사용하지 않았던 성대가 긁히는 소리를 냈다. 흥분된 호흡이 가느다랗게 안정되어 간다. 굳게 긴장한 어깨에 힘이 슬슬 풀렸다. 한참을 대치하던 에셋이 자세를 슬그머니 누그러트렸다. 꽉 쥐었던 주먹이 살며시 펴지고,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유순하게 젖어든다. 마주한 남자는 금발에 푸른 눈, 유난히 비쩍 마른 체형을 가진 젊은이였다. 



3. 

  하이드라 수장은 변태다. 방 안에 굳이 단을 따로 만들어 제일 높은 곳에 책상을 두었다. 등 뒤로 위치한 벽면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후광 때문에 얼굴이 보이는 일은 절대 없다. 그가 바닥에 엎드린 검정 재규어 털을 발가락으로 쓰다듬는다. 말라깽이 연구원은 샛노란 눈을 한 재규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자네가 에셋을 진정시켰다고.”

  느물거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받아치는 대답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또록또록했다. 

  “예.”

  음성 끝자락이 허공에 흩어졌다. 짝, 짝, 짝. 수장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공허한 울림이 괜히 말라깽이 등을 훑고 지나갔다. 의미 없는 질답이 이어졌다. 


  형광등이 줄줄이 박혀서 복도는 눈이 부셨다. 백열등이 흰 벽에 부딪혀 반사되지 못하고 발광했다. 벽이 홀로 빛을 내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왜일까, 저편이 어둠에 잠겨 좁아지는 시야가 못마땅하다. 머리 위 형광불에는 날파리 날개가 지져진다. 자그만 생명은 약한 전기에도 쉽사리 죽어간다. 바스라진 잔재가 떨어졌다.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걸친 가운을 자신 있게 펄럭이며 걸었다. 보스가 ‘에셋’을 맡겼다. 물론 반발이 심할 테지만 박사가 일전에 죽은 뒤로 마땅히 나서는 사람도, 알맞은 이도 없다. 마침 조종하기 쉬운 신참 연구원이 걸려든 것이다.

  스크래치 한 점 없는 벽면이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셔터가 오른 경계를 넘으면 시커먼 쇠창살이 죽 늘어서 있다. 흑백 색대비가 선연해서 머리가 약간 어찔하다. 걸음마다 음습한 기분이 들었다. 단지 셔터 하나 만으로.

  그는 주위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철창은 비어있었지만, 몇몇은 기계와 결합이 되다 만 개나, 돼지와 합쳐지려다 죽은 소, 머리를 이식하다 실패한 쌍둥이나 아무튼 그런 따위의 온통 혐오스러운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 갇힌 건 물론 금수들이다. 남자는 혼자 납득해서 고개를 주억였다. 언젠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나 아무튼 지금은 전부 짐승이다.

  발바닥에 습기가 푸욱 패였다. 꼭 쌓인 눈을 맨발로 밟은 기분이다. 눈썹을 찌푸리고 다리를 털었다. 그는 방을 지키는 두 명을 손짓했다. 잠금쇠가 돌아가고 딱 그만이 드나들 수 있게끔 공간이 열렸다. 세계 최고 맹수는 다가오는 그림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안정된 두 호흡이 겹쳐진 파동을 가졌을 때, 에셋이 유령처럼 일어나 손을 내민다. 

  “……스, 티브…….”

  안겨오는, 혹은 안아오는 몸뚱이를 그저 내버려두었다. 에셋을 가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어떤 일보다 그를 쥐고 흔드는 게 제일 쉽다. 오로지 그에게만 순종적인 물건이었다.

  일반인의 스무 배는 넘는 진정제를 투여 받았기 때문에 에셋의 눈은 꿈결을 헤매듯 몽롱했다. 반쯤은 잠겨서 자꾸만 몸을 감아왔다. 남자는 파고드는 체온이 평균보다 낮음에 몸서리 쳤다. 살인 기계의 어깨를 쥐고 강하게 밀어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리 많은 힘을 싣지는 않았을 테지만, 에셋은 쉽사리 물러났다. 

  “솔져.”

  에셋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웃는 것같이 입꼬리를 올렸다. 남자는 묘하게 소름이 끼쳐 목을 뒤로 쭉 물렸다. 안광에 이전과 같은 형형함은 없어 약하게 한숨 쉬었다. 에셋은 고개를 흔들더니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부벼댔다. 말라빠진 뼈가 압박에 배겼지만 그것보다 순순히 말을 들으려는 기색이 없어 기분이 나빠졌다. 그새 누군가 감겼는지 길게 자란 머리칼에서는 비누냄새가 난다.  

  “솔져.”

  좀 더 목소리를 깔아 불렀다. 에셋은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더니 애써 올곧게 바라보려한다. 불현 듯 어디서 주워들은 난잡한 정보가 생각났다. 아무리 흐려졌더라도 맹수는 맹수인지라, 시선을 피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물안개 싸인 바다색이 심연처럼 일렁였다. 남자가 괜히 목울대를 넘겼다.

  “미션이다. 타깃은 알게로이 빌헬름, 바티칸의 신부이자”

  굵은 팔뚝이 허리를 감아온다. 남자는 이를 부득 갈았다. 그에게는 순종적이기에, 비위만 약간 맞춰주면 되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걸리는 게 많다. 

  “이 봐, 미션이라고. 이번 미션!”

  “……왜”

  동굴 저편에서 울리는 소리는 단박에 등줄기를 훑었다. 그는 짜증이 확 식는 게 느껴졌다. 그게 못내 창피해서 턱을 더 악물었다. 뒷머리가 당겼다. 고작 이 따위에. 에셋은 우울하게 말했다.

  “왜, 불러주지 않아? 응, 상냥하게…….”

  꼬인 혀는 뜨문뜨문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구조를 지녔다. 그럼에도 맞닿은 눈동자는 서글퍼서 기실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는 있었다. 그는 솟구치는 토기를 어렵게 잠재웠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눈빛을 다정한 척 빛냈다. 속으로 같은 단어를 무수히 되뇌었다. 상냥하게, 그래 상냥하게. 볼근육이 마구 떨렸다.

  “에셋, 잘 들어. 이번 미션은, 아주 중요해.”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억지로 주억인다. 남자가 말했다.

  “네가 잘 해줘야만 하는 일이야. 네 도움이 필요해.”

  “내, 도움?”

  “그래.”

  살며시 넘어오려는 반응에 흥분해버렸다. 에셋은 어깨를 움찔, 떨더니 조심스레 손을 잡아왔다. 속살이는 어조는 완전히 원래의 것을 되찾아 제법 듣기 좋아졌다.

  “도움…….”

  남자는 꼼질대는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괜찮은 결과가 있을 거다. 



4.

  능률이 아주 좋아. 어딜 가도 듣는 말이다. 남자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에셋은 그가 주는 임무라면 두 말 않고 뛰어들었다. 항상 [완벽한 성공]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돌아왔다.

  “스티브!”

  의자에 앉혀졌던 에셋이 자리를 박찼다. 검정색 칠갑 된 옷으로 하얀 가운에 안겨든다. 스트라이크 팀이 총구를 눕히지도, 세우지도 못한 채 섰다. 그들 중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않던 군인은 말라빠진 가운에 정보를 술술 털어놓는다. 보고를 끝맺고 올려다보는 눈은 반짝거려서 말 잘 듣는 개에게 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셋의 속눈썹이 살그머니 내려앉고 약하게 혈색 도는 입술이 옴질댔다. 


  리포트를 끝 낸 에셋이 복도를 걷는 걸음을 멈췄다. 

  “있잖아, 스티비”

  앞뒤로 늘어선 요원이 손목을 한 바퀴 빙 돌렸다. 눈에 띄는 행동은 확연히 줄었어도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 스티브라고 불린, 그러나 스티브가 아닌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그는 가죽질로 된 옷 틈새를 비집더니 다 짓무른 꽃대를 내밀었다. 노란색이었을 꽃은 풍성했던 잎이 다 떨어져 볼품없었다. 그는 잠깐 당황한 듯 숨을 헛삼키고 달랑거리는 꽃잎을 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쉽게도 왼손은 연약한 꽃잎을 만지기에 적합지 않아, 안쓰럽게 구겨버리고 말았다. 어쩔 줄을 몰라 큰 덩치로 쩔쩔 매자 누군가 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에셋이 풀이 죽어 손을 내미는 동안, 남자는 소리 난 쪽으로 눈을 흘겼다. 하나같이 고개를 틀고 아닌 척 해도 입가에 걸린 건 전부 비슷했다. 가느다란 손이 꽃대를 낚아채곤 몸을 돌렸다. 발걸음마다 얼마 남지 않은 이파리가 타일을 노랗게 물들였다. 에셋이 무어라 소리치는 게 걸렸지만 귀담아 듣지는 않았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선반에 걸린 플라스크 서넛이 파르르 떨어댔다. 손에 쥔 꽃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우습게도 훨훨 날아가더니 책상에 사뿐히 내려앉는다. 그는 보글대며 끓고 있는 보라색 액체를 노려봤다. 사실 머리 빈 스트라이크에 화가 난 게 아니다. 정확한 이유는 찾지도 못하고 자신의 연구실을 서성였다.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연구일지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다. 에셋을 잘 다룬 대가로 받은 장소, 그 빌미로 계속할 수 있게 된 개인 프로젝트. 남자는 스포이트를 들었다. 멍청한 스트라이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테다. 그가 하이드라에 들어오기 위해 바쳤던 모든 열정과 실험. 그들이 쥔 절대주의의 과학은, 윈터솔져만 봐도 알 수 있다. 남자는 하이드라 연구원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에셋은 생각보다 커다란 혜택을 제공해 줄 것이며 남자는 졸라 다음가는 박사로 이름 날릴지도 모른다. 단지 졸라는 계단이었다. 그는 뛰어넘고야 말 것이다. 


  방음이 완벽한 복도에서도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새어들었다. 남자는 서둘러 내달렸다. 에셋이 귀환한다고 들었으나 가지 않은 게 화근이다.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죽은 박사 대신 자리를 꿰 찬 대머리는 성격이 괴팍했다. 들어서자마자 던져지는 불호령에 끔쩍 놀랐다. 그러나 말라깽이 연구원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저편으로 가 박히는 몸뚱이에 숨을 들이켰다. 에셋은 오른쪽 어깨에 길게 자상을 입었고 복부에 총상을 두 발 먹었지만, 아랑곳 않고 그를 치료하려는 연구원을 속속들이 던져버린다. 

  구석에 몰린 박사가 주위를 끈다고 스패너를 던졌다. 빛바랜 금발이 나부끼고 삐걱대는 고개를 가까스로 돌렸을 때, 그는 자신을 안은 짐승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있어야했다. 에셋이 빛바랜 금발 연구원을 끌어안고 으르렁댔다. 지위로 보면 대머리가 훨씬 높았지만 실질적 영향력은 작금의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던 실험 때문에.”

  대머리가 화난 가슴팍을 한껏 내밀어도 에셋의 시선이 향하자 금세 수그러든다. 그는 몇몇의 말단마저 데리고는 문 밖으로 빠져나가버렸다. 이미 한 바탕 한 뒤인지 타일은 군데군데 깨져 있었고 핏자국이 점점이 떨어졌다. 그게 에셋의 상처에서 나온 것인지 그가 죽인 하이드라 요원의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썩 보기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연구원은 반쯤 부서진 원래의 의자 말고 구석에 처박힌 나무의자를 꺼냈다.

  “스티브, 미안해.”

  마취도 없이 대충 소독한 칼로 근육을 찢었다. 피가 줄줄 솟쳐 검정 바지가 더 깊은 색으로 물들었다. 에셋은 신음성도 내지 않고 조용조용 말했다. 머뭇거리며 사과를 건넨다.

  “뭐가.”

  남자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반응하기도 귀찮았다. 흐르는 물감을 무감각하게 닦아냈다. 흰 수건이 원래의 자취를 잃은 채 산처럼 쌓였다. 잘못 건드려 뼈를 긁은 것도 같았다. 손끝에 딱딱한 게 닿았다.

  “네가 할 수 있었는데. 미안해.”

  탄환 하나를 빼내었다. 콩알만 한 게 짜부가 되어있다. 남자가 눈동자만 들어 쳐다봤다. 에셋은 진심으로 걸려했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 크게 작용한 듯 에셋이 환하게 웃었다. 유려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보고 있으면서도 거짓말 같아서 남자는 못 본 척 하기로 했다. 



5.

  선명한 노란 물결에 현기증이 났다. 머리가 어찔하여 버키는 머리를 연신 저었다. 향취가 콧속으로 스며 곁에 선 아이의 체취가 가물거렸다. 안 돼, 속으로 외쳤다. 노란 아이가 노란 물결에 잠겨 들 것 같았다.

  “버키.”

  언덕 너머로 바람이 넘어갔다. 몽실한 구름은 마주본 아이의 홍채와 같은 색이라서 왜인지 눈이 따가웠다. 눈물이 글썽거려서 더욱 방긋 웃었다. 그럼에도 중력을 이기지 못한 무게감이 볼을 타고 흘렀다. 차갑게 선뜻해서 손을 올렸다.

  “버키, 왜 울어.”

  말라빠진 손이 뺨에 보드랍게 와 닿았다. 그 온기가 너무 따스해 멎으려던 눈물길을 터주어 놓는다. 덩치도 큰 게 질질 짠다고, 엄마가 등을 때리던 게 기억이 난다. 버키는 이를 악물었다.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바보야.”

  고개를 모로 숙이고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둥글게 굽은 등이 잘게 떨렸다. 작은 아이가 두 팔 벌려 그를 안아왔다. 

  “왜 울고 그래, 멍청아. 이 멍청이.”

  버키는 목을 간질이는 울음을 견딜 수 없었다. 뱃속부터 화끈거려 명치를 차고 오르는 울음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몇 십 년 묵은 설움이 순간에 터졌다. 조그만 품은 그를 모두 안아주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행복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스티브.”

  버키가 가녀린 밀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응.”

  너무 꼭 안으면 부러질까봐 손끝이 파들거린다.

  “스티브.”

  시야 가득 찬 노란색이 파도쳤다. 

  “그래.”

  고소한 버터향이 나는 것 같다.

  “스티비.”

  소년의 피부에 노란색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꽃으로 화했다.

  “스티비.”

  “그래 멍청아.”

  작은 친구는 메아리를 남기고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6.

  “스티비!”

  가슴팍이 꾹 죄여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잘게 어지럼이 난다. 아직도 눈꺼풀에 노란빛이 들어 환하고 밝은 잔상이 어른거린다. 버키는 빈손을 들어 허공을 저었다. 방금 날아간 꽃씨, 노란 스티브의 끝자락이라도 잡아야했다. 이 멍청아, 어디 있는 거야. 연약한 친구는 흩어져서 어딘가에 울고 있을 것만 같아, 버키는 자꾸만 서러워졌다. 혼자 외로울 녀석이, 혼자 외로운 자신이. 

  급히 들어 올린 왼팔은 이상스레 무거웠다. 아니, 어깨가 시려운 지도. 찬 기운을 담은 기동음은 귀를 꿰뚫고 단박에 금색을 몰아냈다. 버키는 왼팔을 쥐었다. 살과 피와 뼈가 있어야할 곳을 더듬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서, 헛손질은 자꾸만 눈발을 움키는 것이다.

  “아, 아아…….”

  번개가 쩡쩡 내리쳤다. 뇌리에 꽂히는 천둥과 남아버린 자국. 어금니가 흔들리고 속에 신맛이 올랐다. 뻗은 손가락에 쇠창살이 와 닿으면 점멸하던 정신이 훅 나간다. 무기력과 어둠이 발목을 감았다.

  “아아, 스티비!”

  눈을 떠도 감아도 똑같은 어둠이었다. 홉뜬 눈은 의미 없이 깜박인다. 한기가 들어 이가 딱딱 떨렸다. 양 팔로 스스로를 감싸보지만 왼팔이 얼음장이라 오히려 온기를 앗아가고 말았다. 병자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고막 저편으로 여전히 번개가 떨어지는데, 그중에 구둣발이 섞여 들린다. 그를 둘러싼 숨소리가 하나 둘, 점점 늘어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 살갗을 찌르는 집중과 살기는 오히려 속을 싸하게 가라앉혔다. 그럼에도 공포심만은 떨치기가 힘이 들어, 버키는 등을 둥글게 말고 전방을 경계한다. 잇새로는 유일한 구원을 되뇌면서.

  [이 봐, 그는 안 와. 죽었다니까?]

  누군가 말했다. 카세트가 찰칵댄다. 테이프 거꾸로 감기는 소리가 난다. 딱, 찰칵. 재생 버튼을 눌렀는지 지직대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반쯤 잠겨 울먹이는 말투는 한 발짝 뒤에서 보는 비극인 것만 같다. 모호하게 현실성이 없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서 눈꺼풀을 가만 내렸다.

  [미국의 영웅 캡틴 아메리카가……. 죄송합니다. 캡틴이…….]

  버키는 멀거니 생각했다. 녀석은 캡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스티브 로저스일 뿐이라고. 나를 구한 건 스티브니까 꼭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은 머리가 헤집혀질 때, 그 이후로도 유효했다. 그는 아직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솔져.”

  태양은 꼭 돌아온다.


  붉은 비상벨이 하도 사납게 울어대기에, 쉴드에 발각이라도 된 모양이라 생각했다.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세시 반을 약간 넘는다.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탓에 창문은커녕 빛이 하나도 들지 않아 바깥으로 시간을 더듬으려던 건 애초에 포기했다. 그래도 습관이란 몸에 밴 것이어서 예전 살던 집 창문이 있던 벽면을 무심코 쳐다보곤 한다.

  “서둘러!”

  낌새가 이상하단 걸 눈치 챘어야했다. 남자는 문을 나서며 자신의 방을 돌아보았다. 다른 곳은 조용하거늘 그의 벨만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내딛은 복도는 연구원 하나 없이 총질하는 군인만 돌아다닌다. 소음을 보아하니 그리 급박한 상황이 아닐뿐더러, 남자는 힘쓰는 일엔 도움은 고사하고 몸집이 작아 총알받이도 여의치 않다. 셔터로 구분된 흰 복도를 걸을 때에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것이구나.

  항시 녀석이 폭주할 땐 단련된 맹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리라 지레 짐작했다. 창살은 촘촘히 짐승 막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데, 사람은 무엇이 무서워 옹기종기 모여 수십 개의 총부리를 겨누는 것인가. 길 터주는 무리를 기묘한 우월함을 담고 지나쳤다. 그러나 곧 헛숨을 삼키고 말았다. 예상은 불쾌한 자취를 남기고 빗나갔다.

  “스티브…….”

  우리 안에 솔져는 없었다. 하물며 짐승도, 무기도 기계도 없었다. 길 잃은 어린 아이가 잔뜩 울음을 머금고 낯선 어른을 밀어내었다. 뿌옇게 빛나지 않는 동공이 어떤 것도 담지 않고 출렁였다. 남자는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혀를 움직였다. 아무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저런 표정을 지을 거다. 나온 건 잔인한 단어였다. 

  “솔져.”

  우습게도 에셋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남자의 기분은 더할 수 없이 더러워졌다. 슬금슬금 눈치 보던 놈들이 총을 내린다. 창살이 남자만 딱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열렸다. 발뒤축을 질질 그으며 침을 삼켰다. 공간 안으로 팔 한 쪽이 들어가자마자 에셋이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문이 슬슬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귓가로 땀이 한 방울 흘렀다.

  “스티브, 스티브. 역시 올 줄 알았어.”

  감격한 목소리였다. 그는 험한 손마디로 남자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힘 조절이 둔탁해 왼쪽 기계손이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에셋은 끔쩍 놀라더니 왼팔을 등 뒤로 감추었다. 

  “아, 이건. 미안해. 사실 나도 어떻게 된 건 지 잘 모르겠어. 미안해.”

  남자는 짜증이 났다. 에셋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고 잡힌 몸뚱이는 숨이 갑갑했다. 떼어내려 해도 상대가 될 리 없다. 선택지는 하나라서 굳이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솔져.”

  에셋의 둥그런 눈이 느리게 꿈벅인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길래 안도했는데, 다시 제 할 말만 하는 게 아닌가. 

  “그들이 네가 죽었다 했어. 그치만 난 당연 믿지 않았지.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걱정되어서 죽는 줄 알았어. 꿈을 꿨는데, 네가 몸이 이-렇게 커져서 날 구하러 왔지 뭐야. 물론 넌 아직 작지만, 날 구하러 온 건 맞잖아. 다행이야, 정말 고마워.”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해댄다. 놔 줄 생각이 없어보여서 남자는 숨을 깊게 삼키기로 했다. 에셋의 팔을 풀려면 놈 스스로가 아니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다. 도와 달라 할 여력도 안 되고 에셋이 그에게 위협적이진 않으니까 우선 참아주기로 했다.

  그리 마음먹으니 그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혼란한 기억을 헤매는 모양이라 아직 잘게 떨리는 등을 마주 안아줄 뿐이지만, 효과는 굉장해서 닿은 박동이 안정적으로 변한다. 에셋은 임무를 마치고 왔을 적과 같이 뺨을 부비고 목덜미에 코를 처박았다. 차고 뜨거운 숨결이 솜털을 간질여 등골이 오싹했다. 뜨끈하게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습관처럼 보드라운 브루넷을 쓰다듬었다.

  “으응, 스티비.”

  에셋은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남자의 귓가에 대고. 


  그대로 잠이 들면 좋을 텐데 말문이 트였는지 에셋은 조잘조잘 혼자만의 과거를 떠들어댔다. 뒤죽박죽인 기억이 그가 되짚기에도 생소했는지 종종 머뭇거리다 슬픈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키지 않는 손을 내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야 했다. 일련의 반복적 매크로였다. 효과는 충실해서 유순해진 눈동자를 보면 ‘다시 하지는 말아야지’, 하면서도 계속 써먹는 것이다. 손에 감기는 머릿결이 꽤 달달한 솜뭉치처럼 느껴져서 그렇다고, 속으로 변명했다.

  “있잖아, 내가 준 꽃 잘 가지고 있어?”

  무릎에 누워 남자의 배에 얼굴을 부비던 에셋이 눈을 빼꼼 내밀었다. 

  “음, 뭐.”

  남자와 유일하게 공유한 시간대를 언급했다. 그는 동그랗게 말간 푸름을 마주하기 껄끄러워 얼버무렸다. 세월을 마음대로 넘나들어 꺼내는 이야기는 대답을 궁색하게 만든다. 꺼림칙한 반응도 알아서 해석했는지, 에셋은 예의 그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건 꼭 순박한 강아지 같아서, 어린 소년의 여물지 못한 감정을 닮아서,

  “응. 같이 보러 가기로 했으니까, 지금은 그걸로 만족하자.”

  알 수 없는 언젠가의 과거를 추억하는 표정이 티 없이 순수했다. 남자는 입술이 딱 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윈터 솔져. 능률 좋은 살인 기계.]

  곱씹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건 없다. 남자는 속이 메슥거려서 자신을 담은 눈을 가려버렸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속눈썹이 깜박인다.



7.

  찍히는 발자국마다 졸음이 묻어났다. 에셋은 만족할 만큼 떠든 후에야 잠이 들었다. 괴었던 머리가 무거워서 다리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남자는 늘어져라 하품했다.

  “재주도 좋아?”

  건네진 한마디에 잠이 확 달아난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같은 방을 썼던 연구원이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노려본다. 남자는 비아냥대는 말투를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허술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졸려서 싸울 힘도 없었다. 대꾸 할 말이 궁해서 고맙다며 등을 돌리려 했다.

  “좋은 보모자리 구했더라.”

  가시 박힌 농담은 진심이었다. 상대는 뚜벅거리며 멀어졌지만 남자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언제까지 자리에 못 박은 듯 서 있었다. 그가 던지고 간 말이 근본부터 흔들어 놨다. 


  다른 연구원과 대화하지 않은 건 언제부터지? 개인 연구실을 받은 건 언제지? 프로젝트를 계속해도 된다는 승인은? 실험의 경과를 묻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지식의 공유는 꽤 기쁜 일이다. 그것마저 끊긴 건 언제부터였지? 하던 보고를 연이어 빼먹었다. 그럼에도 상부에서는 독촉이 없다. 아마 그가 윈터솔져를 접했던 때부터. 믿고 맡기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관심조차 없던 거였다. 


  남자는 위대한 연구를 응시했다. 기괴한 보라색을 띠던 액체는 반 이상 줄어들어 형광 녹빛으로 환했다. 발광체가 온갖 그림자를 일그러트렸다. 귀신의 흐느적거림이 등 뒤로 어른거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기함하며 도망갈 지도 모른다. 미쳤다고 할 수도 있다. 플라스크 안에서 뭉그덩거리는 유동체는 애매하게 연약한 소리를 내었다. 징그럽고 혐오스러웠지만 그것은 남자의 열정이고 자부심이며 정체성이었다. 그가 가진 모든 지식의 집합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꿀 연구는 지금 창고 종잇조각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그건 물론 남자의 처지도 뒷방 늙은이처럼 비참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보이는 것만 이해하면 특급승진을 한 것일 테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다. 연구원이었다. 총질하고 주먹을 내지르는 군인이 아니다. 진리를 탐하고 지식을 갈구하는 학도였다. 의문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나는 대체 무어지? 자존감이 삐딱하게 찌그러졌다. 사자 조련사? 군견 훈련가? 동료의 말이 맞다, 허울 좋은 보모였다. 무기의 장난감이었다. 그는 편리한 도구였던 윈터솔져가 어느새 자신을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했다. 일개 실험체의 애정 상대가 된 자신이 불쌍했다. 이건 다 녀석이 잘못이다. 에셋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취급 당할 위인은 아니다. 

  ‘그래, 그만 두자.’

  혀를 잘근잘근 씹었다. 비리게 피 냄새가 났다. 


  샛노란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었다. 여린 살이 까슬하게 일어났다. 짐승이 냄새를 맡았는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고 킁킁대었다. 남자는 방향을 바꿀 때마다 형형하게 변하는 한 쌍의 구슬에서 먼저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긴장한 가슴팍이 팽팽히 부풀었다. 그제야 보스는 커피 타던 손을 멈춘다. 달각, 티스푼이 받침 접시에 부딪혔다. 쓴 향이 물씬 끼쳤다. 

  “쯧, 이리 와.”

  그가 가볍게 혀를 차며 손짓했다. 재규어는 날렵한 동작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허리까지 올라오는 덩치가 강아지처럼 고개를 들이밀고 애교를 떨어댔다. 남자는 그 꼴이 같잖아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장면은 자꾸 뭔가를 떠오르게 해, 기억이 날 듯 말 듯 가물거려서 마른 목을 꿀꺽 삼켰다.

  “자네의 활약은 익히 들었네. 잘 해주고 있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달라고. 그래, 할 말이란 게 무어야.”

  남자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간신히 운을 뗐다.

  “에셋을 다루는 일에서 손을 떼고 싶습니다.”

  수장은 손가락 뼈마디를 뚝뚝 꺾었다. “제가 원래 하던 실험으로” 뒷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손바닥을 내 보였다. 명확한 표현에 남자가 반사적으로 말을 끊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그는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랗고 호탕하게,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이런 유쾌한 농담 처음 듣는다는 듯이. 놀란 재규어가 바지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기고 나서야 공간은 다시 조용해졌다. 

  수장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끄이는 소리를 냈다. 역광에 가린 얼굴이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 단 하나의 창문 밖으로 주홍색 햇살이 하늘거렸다. 해가 지려면 아직 두 세 시간은 남은 것 같다. 남자는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석양을 보고 싶다고.

  “뭐가 불만이야. 직급을 더 올려줘야 하나?”

  빈정대는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자, 꼬마야. 원하는 건 다 들어줬잖아. 뭐가 필요해. 부하?”

  미간이 지끈거렸다. 남자보다 먼저 수장이 손사래 쳤다. 

  “이것 봐. 자꾸 모르는 소리 할 건가? 대우가 마뜩찮거든 말 하라니까.”

  주절주절 나오는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려운 말이라서가 아니라 마음이 답답해져서.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리란 건 자명했다. 일개 연구원보다 윈터솔져의 핸들러가 훨씬 값어치 나가는 건 맞으니까. 그럼에도 남자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야.”

  설득하려던 말투가 바뀌었다. 말랑하게 보여도 하이드라 우두머리다. 남자에게 잘 대해준다고 좋은 사람인 건 아니다. 남자는 반박을 목넘김으로 삼켰다. 수장이 혀를 쯔쯔 찼다.

  “이런 말 까진 안 하려고 했네. 내가 이 말을 하게 만든 건 자네야. 자네는 엄밀히 말해서 과학에 재능이 없잖은가. 만날, 뭐, 쓸데없는 거나 만들고 말이야.”

  수장이 슬픈 어조로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만드는, 그거 무언가? 우는 젤리? 삑삑대는?”

  재규어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 건 필요가 없어. 있는 거나 잘 활용하자고. 에셋 말이야, 최강의 무기.”

  수장은 제 말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는 이내 더 듣지 않겠다는 듯 의자를 빙글 돌렸고, 멀끔한 뒤통수만 그림처럼 새겨졌다. 남자는 입 안 상처를 꾹 눌렀다. 터진 틈새로 울컥 분노가 넘쳤다.



8.

  원체 알콜이 받지 않는 체질이다. 남자는 말라빠져서 보이는 그대로 술이 약했다. 솔직히는 치명적이라고 해야 한다. 마시면 얼굴에 열이 홧홧 오르고 심장이 두근댄다. 술이 넘어간 길에 불꽃이 돋아 기침을 심하게 하고 나면 피가 비치고 만다. 그럼에도 남자는 연거푸 잔을 비워대고 있었다. 쓴 약을 계속 먹다보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전까지 들지 않던 생각인데 술김인지 우울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래도 눈앞이 가물하고 발이 붕붕 뜨는 기분이라 썩 나쁜 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솜처럼 늘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하늘까지 닿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바닥에 엎어졌는데, 그는 자기가 천장에 얼굴을 맞대고 있다고 착각했다. 시원한 게 좋아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손가락에 감기는 카펫에 ‘왜 천장에 카펫이 깔려있지’하는 소용없는 고민을 잠시 한다.

  ‘남겨두길 잘했지.’

  군인들이 침낭에 옷가지에 코트에 숨겨놓은 술병을 보면 항상 멸시하곤 했다. 그러다 운 좋게 손에 들어온 대여섯 병 중 이상시리 이 한 개는 꼭 버리고 싶지가 않더라. 특별히 예쁘지도 않은 디자인이고 맛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향을 느낄 새도 없었는데. 남자는 침대 밑에 굴러다닌 탓에 먼지 잔뜩 먹은 술병을 끌어안고 약하게 웃었다. 가치 있는 알맹이는 쏙 빠져나가고 텅 빈 껍데기만 보잘 것 없는 육체에 깃든 것 같다. 자조적인 미소가 지독시리 따라붙었다. 

  땅에 얼굴을 대고 있어도 시야가 빙빙 돌아서 어지럽다. 한숨을 깊게 쉬고 일어나려고 옆을 당겼다. 차가운 유리관이 쑥 딸려온다. 살짝 들린 몸은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정말 가까스로 머리를 비낀 플라스크가 산산조각이 났다. 날카로운 파열음은 술 취한 고막도 커다랗게 두드렸다. 흐릿한 너머로 형광이 꿈틀거린다. 남자는 아연해졌다. 

  “하, 하하…….”

  너무 허무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폐포가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는다. 메마른 조소에 반응했는지 그가 만든 뭉탱이가 꿈틀거렸다. 삐익 울더니 곧 물이 빠져 죽어버린다. 남자는 갑자기 유쾌해서 견딜 수 없어졌다. 온 근육이 근질거려 비틀거리면서도 벌떡 일어섰다. 뜨겁게 속을 태우는 건 흥겨운 서글픔이다. 그는 책장에 꽂힌 서적을 마구잡이로 꺼냈다. 서랍에 정리해둔 파일첩도 모조리 들어냈다. 책상과 바닥에 어지러이 펼쳐진 보고서와 이론 설명, 실험계획. 빠짐없이 품에 안고 문을 열었다. 흰 복도에 검은 글씨로 빼곡한 종이가 매 딛는 장소바다 흔들렸다. 


  하이드라도 밤은 거스르진 못해서 사위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뒷문 중 제일 사람이 적게 드나드는 곳으로 나온 남자는 흙모래에 안고 온 걸 던졌다. 양장본 전공 표지가 우직 찢어졌다. 저 멀리 굴러가는 쪼가리가 보인다. 줍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위태로운 손으로 긁었다. 제대로 힘이 들지 않아 헛손질이 여러 번, 열댓 개 넘게 부러뜨렸다. 발치에 떨어진 무수히 많은 동강과 마지막, 작은 불씨는 힘차게 타올라 그의 손을 떠났다. 나무를 천천히 살라먹는 혓바닥이 움틀댄다. 날름날름 조금씩 먹더니 잠시 후에는 넘실대며 검은 도화지 위에 자취를 길게 남긴다. 우뚝 선 불길은 바람이 거세도 일렁이기만 할 뿐이다. 남자는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또 한가득, 책장이 비고 팔이 아파서 그만두고 싶어질 때까지. 남자는 책을 옮기며 자신이 왜 이러는지 고민했다. 몽롱한 뇌는 연산이 느려 결국 답을 도출하지 못한다. 

  장작은 충분하다. 아주 어릴 적 캠프파이어 하던 추억처럼 꽤 높이 오른다. 밤바람에 종이 탄내가 섞였다. 향내는 시골 공기와 닮아있다. 별도 없는 하늘에 불씨 단 잿가루가 날아다닌다. 그 모양은 은하수이고 망막을 덮치는 건 붉은 별이다. 흰 종이와 남색의 하늘, 검게 탄 재와 빨간 불길. 원색이 생생하다. 그러나 장소에 옳지 않은 밝은 색 물감이 눈에 띄었다. 남자는 허리를 구부렸다. 노란 꽃이 말라 비틀어져서 바스락댔다. 둔중한 울림은 뒷목을 세차게 후린다. 


  걸음은 익숙하게 지하로 향한다. 비틀거려서 계단을 두어 번 헛디뎌 뼈가 툭 불거진 무릎이 이미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했다. 굴러서 도착한 복도는 허연 포말처럼 넘실댄다. 남자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들었다 놓는 일련의 행동을 반복한다. 흰 벽은 사념을 담아 의문을 두드린다. 남자는 왜 그가 이 길을 걷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제와 똑같은 벽이 왜인지 슬슬 좁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꽉 막힌 숨이 공기를 마시라고, 더 마시라고. 이상하지 왜 들이차는 건 탄소뿐일까. 

  땅이 훅 솟아서 콧대를 맞았다. 저편 철창이 머리를 때린다. 쇳덩이가 아파서 신음이 나왔다. 멍청한 이성으로도 아픔은 그대로 느껴진다. 시간이 꽤 지나 술이 깰 법도 한데 연약한 항체는 알코올 분해하는 것조차 힘에 부치나보다. 그래도 이전보다 걸음이 안정적이 된 것이 여기저기 박아댄 덕인지도 모른다. 끝 간 데 없는 시야에 에셋이 이미 도망쳤나 싶기도 했다. 내가 찾아갈 줄을 알고. 내가 어찌할 줄을 알고.

  “누구야?”

  속살이는 녀석의 음성이 들린다. 바라본 곳에는 에셋이 좁다란 간이침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비틀대는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아주 작은 틈, 남자만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만. 

  “스티브!”

  환하게 밝아지는 표정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그의 것이 아닌 이름을 부를 때에 에셋은 항상 기뻐했다. 들뜬 외침이 속을 뒤집어 놓는다. 울컥, 온갖 감정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이를 부득 갈았다. 자신을 안아오는 무방비한 두 팔을 한끝차로 피했다. 남자는 에셋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뺏어들었다. 손에 들어온 날붙이는 차가웠지만 이내 두부 자르는 감촉만 남기고는 따뜻해졌다. 타고 내린 피가 살갗보다 뜨거웠다. 그는 남자가 어떠한 행동을 해도 피하지 않았다. 찔린 상흔에 손을 얹고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했다. 기계팔로 복부를 부여잡고 사람 손을 남자에게 뻗었다. 

  “스티비, 무슨 일 있어?”

  늘어뜨린 눈썹과 울망한 눈동자가 무죄를 주장했다. 남자는 인상을 쓰고 손목을 돌렸다. 살이 찢어진다. 피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귀를 막고 싶은데 두 손 모두 칼을 쥐는 데 사용하고 있다. 안아오는 몸이 버거웠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내질렀다. 에셋은 지혈하느라 피범벅이 된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감싸온다.

  “괜찮아?”

  그것이 소름끼쳐서 몸통을 밀어 넘어뜨렸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음에도 기꺼이 물러나 바닥에 뒷머리를 찧어 박는다. 상냥하게 질척한 손길은 오히려 그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남자는 토기가 오른다. 구토감을 참고 파묻힌 나이프를 빼내 가슴에 겨눴다. 깔고 앉은 육체에서 피는 뜨끈하게 솟쳐 오르는데도 주위는 계속해서 써늘해지기만 했다. 겨울을 가득 베어 문 것 같이 추웠다. 오한 든 티가 났는지 에셋이 남자를 안아왔다. 그러면서 슬프게 말한다.

  “스티비, 무슨 일이야.”

  보면 안 되었다. 간절한 음성에 고개를 움직여선 안 되었다. 일렁이는 눈동자는 물막에 싸인 새벽바다였다. 짠 소금내음이 콧속으로 스민다. 종종 울 것 같은 표정을 했었다. 지금은 정말로 눈물을 머금고 있다.

  “스티비.”

  목 메인 목소리가 감정을 호소했다. 우물거리는 입술이 보랏빛을 띤다. 에셋의 날숨이 차가워진다고 느꼈다. 타고 미끄러진 한 방울이 짙은 머리칼 속으로 숨어들었다. 점점이 흩어지는 물기가 잡힐 듯 또렷했다. 기계가 울 리 없는데. 남자는 젖어든 에셋의 눈가를 훑었다. 손을 적시는 건 분명히 짠 물이었다. 눈물 머금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댔다. 스티비, 스티비.

  배신당한 기분이다. 하루 동안 맛본 온갖 종류의 허무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무너짐이었다. 남자는 에셋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의 잘못이라면 남자에 순종했을 뿐이다. 당연하다 무기잖아, 그렇게 여겨 왔다. 방어 기제인줄도 모르고 자신을 맹신했다. 그제야 남자는 에셋의 몸에도 피가 돈다는 걸 깨닫고야 말았다. 여태 닦아냈던 수많은 핏자국과 혈흔, 상처가 나는 피부와 근육. 에셋은, 아니 그는, 기계도 무기도 하물며 짐승도 아니었다. 남자와 똑같은 인간. 울 줄 아는 인간일 따름이었다.

  언제부턴가 울리는 경보가 붉게 돌았다. 차단되었던 청각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눈 닿는 곳은 모두 빨갛다. 피칠갑이 된 미지수는 x 수식은 없다. 희대의 난제는 수식조차 없었다. 진리가 거짓이란 걸 깨달을 때에 회전은 멈춘다. 하나의 세계는 소멸되고 감옥 풍경이 스르르 멀어진다. 검은 구두가 쏜 총성은 단 한 번, 총알도 단 한발이다. 고민을 끝내고 지옥으로 끌고 간 건 그 하나의 외침이었다. 

  “스티비!”

  검게 변한 망막 너머 에셋이 소리쳤다. 머리가 터진 남자는 늘어진 손가락을 까딱였다. 

  “스티브, 정신 차려! 스티비!”

  오른쪽 두개골이 반 이상 날아갔다. 푸르게 예쁜 안구가 빛을 잃었다. 에셋은 간절히 외쳤다. 움찔대는 손을 잡고 지극히 기도했다. 스티브 제발 일어나. 스티브, 나의 스티브, 작고 어린 내 스티브. 

  “아아, 스티비!”

  품에서 식어가는 몸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돌이킬 수 없을 죽음이 그의 스티브를 또다시 빼앗는다. 참고 참았던 울음이 둑 터주듯 새어나왔다. 서럽다. 서러움이 넘친다. 물기가 어른거려 반쯤 터진 금발을 자꾸 흩트려 놓는다. 툭툭 떨어지는 눈물은 방해가 되는데, 젖은 뺨을 훔칠 여력이 없다. 

  “스티브, 스티비.”

  백 번 불러 네 대답이 없다면 백 번을 더 부를 테다. 서글픈 손길이 안쓰러운 피부 결에 매달렸다. 닳고 닳아 서로가 모래알이 되어 날아갈 수 있다면. 에셋은 죽은 청년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저 스티브 스티비 계속하여 이름을 불러댔다. 젖은 얼굴이 막힌 하늘을 보며 오열했다. 시컴케 가슴을 후벼파는 고함이었다. 우울을 뒤흔들고 폐를 쥐어짜는 설움이었다. 유일한 조각을 잃은 에셋은 고장 나 버렸다. 포맷을 해 냉동고에 넣어두는 수밖에 없다.



9.

  첫 페이지는 온통 노란색이었다. 버키는 오래된 책을 들추듯 과거를 훔쳐보았다. 표지가 튿어지고 뒷부분이 송두리째 뽑혀나갔을 때, 손에 쥔 유일한 장에는 봄꽃 봉오리가 틔어 있었다. 책대까지 스며든 꽃물이 달콤했다. 

  “새벽이 될수록 멍청해지는 기분이야.”

  버키의 말에 스티브가 푸스스 웃었다. 

  “넌 항상 멍청하잖아.”

  가늘게 눈을 흘기며 내려다보는 게 못내 괘씸해서 옆구리를 간질였다. 스티브가 뒤로 꺄르륵 넘어간다. 천식이 도질까봐 겁이 나 금세 그만뒀지만.

  “야, 그래도 어제 들었잖아. 기억의 첫 문장. 새벽이 없으면 아침도 없다. 해 뜨고 처음 보이는 걸 새겨둬라.”

  “아아, 뭐-.”

  버키는 흥미가 떨어진 듯 입맛만 다셨다. 귀를 후비는 손가락을 스티브가 잡아끈다.

  “그것만 기억하면 되는 거 아냐?”

  짓밟히고 얼룩지고 찢기고 태워도 새겨진 처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버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버키의 첫 문장은 졸려운 교회에서 처음 만났던 따뜻한 스티브의 색이었기 때문이다.

Posted by Kim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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